반응형

태양과 달, 우리가 시공간 안에서 보는 모든 물체는 우리의 시각에 의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상호 작용하는 현실은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르다. 시공간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최종적인 현실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실수를 했다.

양자물리학

코펜하겐 해석

신은 확률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 고로 확률로 과학을 말할 수 없다. 즉 미래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전 물리학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젊은 과학자가 신은 주사위 놀이, 즉 확률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에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법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전면 반박했다

 

아인슈타인에게 당돌하게 반항한 젊은 과학자의 이름은 닐스 보어였다.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물리학자였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제시한 이론 물리학자였다

 

그 둘이 만든 것이 "코펜하겐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미래는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고전 물리학에 반기를 드는 이론이었다

 

그러면 코펜하겐 학파가 말하는 예측할 수 없다와 불확정성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닐스 보어는 원초적인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본다는 행위 자체를 의심한 것이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이론은 다 빼고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까만 밤하늘에는 달이 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달이 안 보인다고 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못 봤다고 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 그것이 닐스 보어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달을 보지 않으면 그 달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전진하며 앞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물체도 우리가 지나가며 뒤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물체도 우리가 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저 달을 다른 사람이 봤으면, 하다못해 저 달을 다른 동물이 봤으면, 그때도 저 달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답은 같았다. 달은 없는 것이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내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저 달이 존재할 수 없다. 그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내가 안 봤으니, 저 달이 무조건 없다는 관점보다는 내가 안 봤으면 저 달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불확정적 접근을 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직접 보기 전까지는 가능한 모든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있는 상태, 없는 상태, 작은 상태, 큰 상태, 불분명하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보게 되면 그때부터 분명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세계 해석

분명한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세계 해석을 먼저 아는 것이 좋다. 설명에 앞서 다세계 학파는 코펜하겐 학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에 닐스 보어는 다세계 해석을 반대했다는 뜻이다. 그 배경을 알려면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세상 모든 물질은 원자이다

 

모든 것은 원자가 모인 결과다. 우리도 원자고 지구도 원자고 우주도 원자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양자역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원자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전자가 있다. 바로 그 전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보기 전까지는 전자가 있는지 없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론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결과는 여러 우주들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다세계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우주를 직접 선택할 수 없을까?

 

이에 대해 양자물리학자 바딤 젤란드가 충격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는 "가능태"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가능태는 모든 가능성이 잠재된 정보 공간이다

 

우리는 가능태 안에서 살고 있다. 가능태 안에 여러 버전의 현실이 무한히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중 한 버전을 체험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파도를 타는 것처럼 가능태 속에 있는 무한한 버전의 현실들을 이동할 수 있다. 각 버전의 현실들에는 다른 버전의 내가 있다

 

그중 어떤 버전을 체험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박스를 열었을 때, 왼쪽에 있을지 오른쪽에 있을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차원의 현실들 속에 모든 가능성의 경우의 수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 차원을 이동하며 내가 선택한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는 우주는 보면 볼수록 커다란 기계보다는 거대한 생각처럼 보인다고 했다. 우주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현실은 결국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좋든 싫든 말이다

 

만약에 지금이 싫다면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다른 차원이 현실로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가능성의 차원은 무한한 버전의 현실들이 존재하니 말이다

 

우주는 여러 개인데 그 모든 우주가 생각이라면 현실은 결국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물리학자 리처드 콘 헨리는 우주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일한 현실은 정신과 관측뿐이다. 그러나 관측은 물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관측을 물체에 한정하는 경향을 버려야 한다. 우주는 비물질적이다. 정신적이고 영적이다. 살아라 그리고 즐겨라.

반응형

+ Recent posts